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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듬뿍: 책 그리고 영화

청소년소설_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귤의 맛> / 조남주

by 소소듬뿍 2023. 5. 10.

오랜만에 청소년 소설을 집어 들었다.


 
<귤의 맛>
조남주 장편소설
문학동네
 


중학교 3학년, 열여섯 여자 친구 네 명의 이야기.
아픈 동생이 있어서 엄마의 관심이 그리운 (공부 잘하는) 다윤,
가부장적인 아빠의 사업 실패,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던 주택으로 이사 간 해인,
전적으로 믿어주는 외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사는 은지,
평범한 4인 가족, 평범한 성적에 외모, 하지만 어딘가 겉도는 듯한 소란.
 
과거의 친구 관계, 가정사 등 각기 다른 경험과 사연을 갖고서
제일 인기 없는 영화부에서 만난 네 친구의 관계를 묘사한다. 
 
각각의 미묘한 심리묘사에
스릴러물도 아닌데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었다.
친구가 전부였던 것 같은 그 열여섯 시기에
주인공이 친구를 잃을까봐, 혼자가 될까 봐, 외로울까 봐, 불안불안해하면서 말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이들은 부모님을 한 달을 졸라 제주도 여행을 떠난다.
은지 엄마가 동반한다는 전제가 처음부터 붙었지만, 그래도 한 달을 졸라야 떠날 수 있는 여행이다.
 
아이들에게 선택이란 이토록 제한적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마음은 오롯이 자기 몫이다.
 
제주도 여행에서 은지의 제안으로 어쩌면 즉흥적인 약속을 한다. 
다 같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인기 없는 동네의 고등학교라면 다 같이 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비장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미심쩍고 느슨한 약속이다. 
 
공부 잘 하는 다윤이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외고 원서를 쓰고, 
사업 실패한 아빠의 이상한 책임감으로 해인이를 위장전입까지 시키며 자사고에 원서를 낸다.
 
하지만 미스테리한 사건들로 다윤은 외고 면접을 못 보고,
해인은 위장전입이 들켜 자사고 진학이 무산된다.
 
'선택'할 수 없던 일들이 가득하던 아이들은
동아리로 영화부를 선택했고,
영화부에서 만난 친구들과 진학할 고등학교를 선택한다.
 
미스테리한 사건들의 전말이 밝혀지며
아이들의 선택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이 마음에 든다.
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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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에서
 
93p. '해인의 이야기' 중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넌 네 인생 망친 애가 원망스럽지도 않니?"
해인은 아빠를 빤히 보다 말했다.
"제 인생 망치지 않았어요. 망쳐지지 않았어요. 아빠."

 
 
120p. '은지의 이야기' 중

 
그때 은지는 처음으로 잘못하지 않아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일에
영향을 받고 책임을 지고 때로는 해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도. 

 
 
137p. '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중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 일 없기를 바라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별일 없는 하루가 끝나도
다음 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 감정 사이를 넘어오던 순간을 기억한다.
소란은 그때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45p. '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중

 
의례적으로 대꾸했지만 소란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은지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대고,
두 눈을 맞추고, 자신에게만, 작은 목소리로,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좋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소란은 친구들이 성실하게 빚어 놓은 감정의 덩어리 안으로
단단한 껍질을 뚫고 쑤욱 들어간 기분이었다.

 
 

 
귤의 맛
《82년생 김지영》으로 차이와 차별의 담론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귤의 맛』. 한 개인에게서 공감의 서사를 예민하게 끌어내는 저자가 이번엔 미열과 고열을 오가며 초록의 시간을 지나는 한 알 한 알의 존재에게 시선을 맞춘다. 숱한 햇볕과 바람을 들이고 맞으며 맛과 향을 채워 나가는 귤 같은 너와 나의 이야기. 사춘기나 과도기로 명명되는 시기를 쉽게 규정하지 않고, “어차피 지나갈 일, 별것 아닌 일, 누구나 겪는 과정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 자체의 무게와 의미로 바라보고 싶어 한” 작가의 다정한 응시가 담겨 있다. 영화 동아리에서 만난 소란, 다윤, 해인, 은지는 ‘맨날 붙어 다니는 네 명’으로 통한다. 중학교 3학년을 앞두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이들은 다소 충동적으로 한 가지 약속을 한 뒤 타임캡슐에 넣어 묻는다. 앞날이 바뀔지 모를 이 약속 뒤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는데 소설은 이 약속을 둘러싼 네 아이들의 속사정을 번갈아 풀어놓는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단짝 친구와 어리둥절하게 끝나 버렸지만 위로받지 못한 소란, 학교의 기대와 모두의 호의를 받고 있지만 외로운 다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수신 불능의 아빠와 무너진 가계로 뻑뻑한 상처를 입는 해인, 이유를 모른 채 친구들의 무리에서 잘려 나간 기억이 있는 은지. 어긋나는 관계의 화살표 속에서, 미묘해서 오히려 말 못 하는 감정의 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막막함 속에서 지금의 시간을 쌓아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평범한 날 속에 자잘한 생채기가 나면서도 저마다의 악력으로 가지를 쥐고 초록의 시간을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닿아 있다.
저자
조남주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0.05.28
300x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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