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하고 싶고, 되고 싶어 아등바등거릴 때가 있다.
대학시절 취업을 준비할 때도 그랬고,
경력과 무관하게 처음 출판 번역에 문을 두드릴 때도 그랬다.
졸업을 앞두고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오면 잘 모르는 업종, 기업이라도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라도 쓰지 않으면 불안하던 시기다.
그래도 한번 비벼볼 만한 만만한 직군에 써보지만
복붙의 이력서에는 나의 영혼이 없다.
그래서 그런가 무수하게 떨어졌다.
(붙은 사람의 이력서에는 영혼이 있었을까?)
그러다가 처음 합격통지를 준 곳은 외국계 은행 회계팀.
영문학과와 회계학이라는 이상한 전공 조합이 꽤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입사한 지 6개월도 안 돼서 이 외국계은행은
북한에 검은돈을 건넸다는 혐의로 미국 제재를 받았다.
사실 당시 직원 중에
이 혐의에 대해 아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지만
회계팀에서 손익계산서의 매월 당기순이익이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은 직장에 다니고 싶던 신입사원은
얼른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다니고 있는 직장을 보험 삼아,
이직에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기업을 골라,
떨어져도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처음 이력서를 낸 곳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취업 전 그토록 마음 졸여가며
밤새 썼던 무수한 이력서가 무색했다.
6개월 새 나의 능력이 변한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
취업을 예로 들었지만 가끔 '해탈'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또 이 단어가 생각이 났다.
이직을 하면서 휴직을 끝낸 나는
다시 9 to 6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호흡이 긴 단행본을 번역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로망이었던
번역이란 일을 막 하게 된 이 시기에 또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어린이책, 그림책을 번역하고 싶었던 만큼
짧은 호흡의 책이라면 직장생활과 병행하여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체력이 조금 부치긴 한다.)
에이전시에서 '공룡책' 샘플을 보내주었다.
아이가 공룡을 좋아하는 터라
내가 번역한 책을 아이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번역에 정말 심혈을 기울였다.
더 잘하고 싶어서 그 짧은 몇 페이지를 번역하면서
자료도 엄청 찾으면서 지식책인 만큼 정보도 주고
재미있게 글을 풀어가고자 애를 썼다.
결과는 탈락.
선정된 역자의 번역을 보니 참으로 간결하다.
다시 나의 번역을 본다.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여기저기, 힘이 들어가 있다.
새벽까지 애쓴 나의 노력이 허탈하고
또 좋아하는 공룡책을 못 보여준 게 아쉬워서
행복이에게 이야기했다.
"행복아, 엄마가 행복이 좋아하는 공룡 책 번역 진짜 하고 싶었는데,
엄마보다 더 잘한 사람이 있어서 엄마가 못 하게 됐어 ㅠㅠ"
"엄마, 그 책 하고 싶었어?"
"응, 우리 행복이가 좋아하는 공룡책 엄마가 꼭 번역해서 같이 보고 싶었지."
"엄마, 괜찮아. 다음에 더 재미있는 책 하면 되지. 더 재미있는 책이 있을 거야."
제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평소에 내가 해주던 말대로
이렇게 너그럽게, 여유롭게 말하는
다섯 살 꼬맹이 덕분에 다시 인생을 배운다.
"다음에 더 재미있는 책"
* 공룡책 샘플 번역의 교훈.
힘을 빼자.
하고 싶은 마음이 넘치면 글에 힘이 들어간다.
욕심이 글을 간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
공룡책 샘플을 떨어지고 새로 받은 샘플.
게임북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보는 신기한 형식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게임에는 별 재능이 없는 터라
뭐 이런 책도 있네 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샘플 번역을 보냈다.
역시 운명의 수레바퀴는 제멋대로다.
아등바등 그렇게 하고 싶던 책은 열심히 해도 안 되더니,
안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책은 역자로 선정되는 아이러니.
그래서 또 한번 해탈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나를 얽매지 말자. 마음을 비우자.
'꿈이 듬뿍: 번역가 > 번역 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린) 번역 일지_도서 리뷰 리뷰 리뷰 (3) | 2021.09.28 |
---|---|
(밀린) 번역 일지_세 번 째 번역 마감 (0) | 2021.09.28 |
번역 일지_ 번역 기획서 투고 (7) | 2021.06.25 |
번역 공부_번역가의 미래 (0) | 2021.05.27 |
번역 일지_도서 리뷰하다 심리 치유 중 (0) | 2021.05.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