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나는 싱크대 앞에 서 있었고
행복이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엄마, 난 축구 선수가 될 거야.
다섯 살, 우리 집 꼬마의 첫 장래희망이 나왔다.
뭐든 처음인 게 많았던 아가 시절과 달리
요즘에는 꽤 능숙하게 잘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오랜만에 '처음'이라는 단어를 써본다.
그것도 장래희망이라니 더더더 멋지다.
작년에는 탱탱볼을 사서 집에서만 가지고 놀았다.
처음에는 굴려보고 던져보고 코앞 거리에서 받아보고,
그러다가 올해 들어 바닥에 튀기기와 발로 차기를 한 것 같다.
또래 대비 큰 키는 아니지만,
키가 100센티미터가 넘어가면서
우리 집 거실이 유화에게도 작아졌다.
놀이터도 나가기 싫어해서
겨우겨우 애원해서 나가 놀던 꼬마가
이제 집에서 노는 게 조금은 시들해진 다섯 살 언니가 되었다.
올봄 탱탱볼을 들고 잔디밭이 너른 공원을 찾아갔다.
아빠랑 편을 먹고 나에게 뻥 하고 공을 찬다.
나의 역할은 행복이의 공을 열심히 막고 차고,
그러다가 한 번씩 공을 놓치는 것이다.
골인의 기쁨을 느껴야 하므로.
그렇게 점심도 안 먹고 꼬박 3시간을 공을 찼다.
정말 얼굴이 벌겋도록 뛰어다녔고,
간식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벤치에 5분 이상 앉아 있지를 못 했다.
그다음 토요일에도 공터에서 2시간,
그 다음 날도 2시간씩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쫓아다녔다.
엄청 재미있었나 보다.
그러더니 첫 장래희망이 '축구 선수'가 되었다.
고슴도치 엄마는 그 장래희망이 멋있었다. 축구 선수!
퇴근한 남편에게
“행복이 축구선수 한대”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자,
“여자 축구선수,
우리나라에서 지소연이 제일 잘하는데 그래도 힘들어.”
현실적인 답변이 먼저 나온다.
물론 나에게만 현실적이라 정말 다행이다.
행복이에게는 멋있다고 했던 것 같다.
-
'여자애가, 여자 축구 선수?'
하지만 축구 선수 앞에 여자가 붙는 순간 힘겹게 들린다.
가끔 로봇과 자동차를 좋아하고,
치마는 싫어하는 행복이를 보며
'여자애가~'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말이 듣기 싫어서
행복이의 첫 장래희망인 축구선수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어서
여자 축구선수가 나오는 그림책을 찾아보았다.
못 찾는 책이 많았기를 바라면서,
딱 두 권 찾았다.
후즈갓마이테일의 <야, 그거 내 공이야!(That's my ball)> 와
풀빛의 <히말라야의 메시 수나칼리>
<야, 그거 내 공이야!>는 뻥 차 버린 공을 찾아다니는 소녀 이야기.
축구라는 경기 자체의 매력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남녀노소 인종이 섞여 축구하는 모습을 무심하게 보여주는' 멋진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작년인가 읽어줬을 때에는 별로 관심 갖지 않았는데,
축구선수가 장래희망인 지금은 재미있어하려나 모르겠다.
<히말라야의 메시 수나칼리>는 실제 수나칼리 선수의 이야기라고 한다.
네팔의 산동네에서 축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열두 살 소녀,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을 보살펴야 하며, 14살부터 결혼을 할 수 있는 문화(?)에서
성 고정관념을 깨고 멋진 축구선수가 되었다. (조혼, 할례 같은 건 악습이라고 생각한다.)
글밥은 좀 되어 보이지만 한 번 빌려보고 싶은 책이다.
-
쓰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영화 <야구소녀>도 생각이 났다.
이주영 배우가 연기한 야구소녀.
초등학교 때부터 천재 야구소녀로 이름을 날렸지만,
프로구단에 입단할 수 있는 평가 기회조차 없었다.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안타깝고, 포기하지 않는 그 열정에 눈물 흘리며 응원했던 영화.
* <야구소녀> 주인공 주수인 대사 중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코치님이 어떻게 알아요. 왜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해요!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니깐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
-
우리 행복이가 축구 선수를 한다고 하면
나는 응원할 것이다.
우리 행복이가 컸을 때에는
지금보다는 여자축구가 활성화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행복이가 보고 듣고 해 보는 게 점점 많아질수록
장래희망은 계속 바뀌겠지만,
여자라는 성별이 행복이가 꾸는 꿈에
제한 요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뭐든 해보고 부딪혀 볼 수 있는 용기를 줘야지.
장점도 단점도 아닌 성별로
우리 행복이의 가능성을 묶어두지 마세요!
다음에는 '여자애가~'라는 소리를 들으면
'하하' 그냥 웃으며 입을 닫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한마디 해야지.
'여자건 남자건 중요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하면 되죠.'
(더 임팩트 있게 하고 싶다. 고민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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