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발레 관련 에세이 번역을 하면서
번아웃이 심하게 왔다.
회사 생활 10년 하면서도
번아웃이라고 부를 만한 상황은 겪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로망이랍시고 무작정 뛰어든 번역 세계,
멋 모를 때 용감하게 뛰어들어 부딪히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번역은
회사 생활과 비교했을 때 인풋 대비 아웃풋이 적은 일이었다.
일하는 시간은
회사에 다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경제적 보상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번역할 때에는 돈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대로 몰입해서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3개월 뒤
통장에 찍힌 정산 금액을 보고 나면
글쎄, 힘이 빠지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면
훨씬 나은 보상이 주어지겠지만,
아직은 그 길이 나에게 열리지 않았다.
언젠가 열리긴 할까, 조금 막막하다.
번역 에이전시에 등록하고 나니,
원서를 고를 시간이,
고른 원서를 읽을 시간이,
기획서를 쓸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에이전시에서 주는 번역 샘플을
멋지게 거절할 용기도 없다.
무언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상황이 계속될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지금 피폐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을 때,
그때 번아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 집값 10억이 우스운
이 시대에 사는 무주택자가
나의 로망을 위해 경제적인 부분을 포기해도 될까.
남편에게 아이에게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충동적으로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본업인 직무를 뽑는 마음에 드는 회사의 공고를 보고
무작정 이력서를 썼다.
토익 점수도 없었지만,
그동안 출간된 책을 영어 능력 증명자료로 첨부했다.
번역 마감 후 에이전시에는
한 달 동안 샘플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달을 팽팽 놀고,
다시 번역이 하고 싶어서
번역에 대한 의지를 다시 다질 때쯤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서류 합격.
생각도 하지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진행된 필기전형, 면접전형까지 봤다.
한편으로는 되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되지 않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 작년 말부터 그 직장에 다니는 중이다.
본업은 번역과 전혀 무관한 회계직이라 오랜만에 엑셀과 숫자를 마주했다.
10년 동안 마주한 숫자들이라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서 아쉬운 소리가 들린다.
'번역은 10년 동안 안 해봤잖아.'
조금 더 참고 꾸준히 하면 번역가로 인정받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
로망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흔들,
하지만 닥친 현실 앞에 회사에서는 로망을 잠시 접어둔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 실력으로는 단행본을 번역할 시간이 전혀 나지 않기에
에이전시에는 어린이책 샘플만 하겠다고 얘기했다.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은 되는 터라
나름 원서를 읽을 시간이 생긴 거라고,
읽다가 주말에 기획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고,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다.
(킨들 오아시스 10세대도 장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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